김선민 의원 / 김선민 의원실
국내에서 마약류 식욕억제제가 무분별하게 처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에서는 대부분 금지되거나 BMI(체질량지수) 27~30 이상에서만 제한적으로 처방되지만 한국은 BMI 23부터 처방이 가능해 사실상 ‘식욕억제제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선민 조국혁신당 의원은 최근 5년간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1년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마약류 식욕억제제 누적 처방량이 10억 3365만 정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는 연평균 2억 정 이상이 처방된 규모로 비만치료제 위고비(Wegovy)와 마운자로(Mounjaro) 등 비향정신성 약물의 도입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자료에 따르면 식욕억제제 처방량은 2021년 2억 4,342만 정에서 2024년 2억 1,713만 정으로 다소 줄었으나 매년 2억 정 이상이 꾸준히 처방됐다. 2025년 상반기까지도 1억 653만 정이 처방되어 감소세가 뚜렷하지 않았다.
주요 처방 성분은 ▲펜터민(Phentermine) ▲펜디메트라진(Phendimetrazine) ▲암페프라몬(Diethylpropion)으로 각각 불면·불안·의존성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 향정신성 의약품이다.
특히 펜터민은 70만 명, 펜디메트라진은 50만 명, 암페프라몬은 7만 명 이상에게 처방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보건의료연구품질국(AHRQ) 2023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펜터민 복용자는 약 107만 명(인구 대비 0.31%)이지만, 한국은 70만 명(1.35%)으로 미국 대비 4.3배 높은 비율을 보였다.
식욕억제제 처방 환자 108만 명 중 여성은 96만 9,000명으로 전체의 89.7%를 차지했다. 남성(11만 1000명)의 9배 수준이다.
특히 10대 이하 청소년 5899명에게도 55만여 정의 식욕억제제가 처방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더했다.
또한, 외국인 환자 처방도 증가 추세다. 2021년 3만 4063명에서 2024년 4만 3804명으로 늘어나 국내 의료 시스템이 외국인 비만 치료 수요에도 이용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김선민 의원은 “청소년과 여성에게 과도하게 식욕억제제가 처방되는 현실은 외모 중심의 사회문화와 맞물려 심각한 건강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며 “단순한 미용 목적의 약물 남용을 막기 위한 관리 강화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처방 기준은 매우 완화돼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BMI 35 이상 환자에게만, 미국은 BMI 30 이상 또는 27 이상 + 동반질환(당뇨·고혈압 등) 환자에게만 처방을 허용한다.
그러나 한국은 BMI 23 이상을 ‘비만 전 단계’로 규정해 처방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어 단순 체중 관리 목적의 광범위한 사용이 가능하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펜터민과 같은 향정신성 식욕억제제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일본 역시 펜터민을 제3종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해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으며 무허가 반입 시 마약류 밀수로 간주된다.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에 따르면 식욕억제제 관련 이상사례는 ▲불면 ▲지각이상 ▲입 건조 ▲두근거림 ▲어지러움 등이 대표적이다.
2024년에는 총 455건이 보고돼 최근 5년 중 가장 많았으며, 이 중 불면 68건, 지각이상 50건, 어지러움 48건이 보고됐다.
부작용 신고는 매년 이어지고 있지만, 정부의 사후 관리 및 모니터링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식약처가 밝힌 ‘사전알리미’ 경고 현황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식욕억제제를 기준 외로 처방해 경고를 받은 의사는 총 3636명이었으나 실제 행정처분으로 이어진 경우는 단 11건(0.3%)에 불과했다. 이처럼 미비한 행정 조치는 사실상 관리 사각을 방치하는 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식약처는 올해 마약류 전담 수사 인력 5명을 추가 확보했다고 밝혔지만, 김선민 의원은 “기준이 느슨한 상태에서 단속만 강화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근본적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김 의원은 “식욕억제제가 연간 2억 정 이상 처방되는 상황에서 여성과 청소년 중심의 남용, 낮은 BMI 기준, 솜방망이 행정조치는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 외모 압력과 의료적 판단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실 속에서, 식욕억제제 처방의 윤리적·공공적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며 “보건복지부와 식약처는 청소년·여성 중심의 오남용 실태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하고, BMI 처방 기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부당한 처방을 방지할 수 있도록 행정처분 및 모니터링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 국민 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이라며 “식욕억제제의 남용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과제”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번 국정감사 자료가 단순한 통계 공개를 넘어 한국 사회가 ‘비만 관리’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쉽게 향정신성 약물을 허용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라고 평가한다.
비만치료의 새로운 대안인 GLP-1 계열 약물 도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약류 중심의 처방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의료계 전반의 처방 윤리와 국가의 규제 수준을 재검토할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높다.